남양읍 활초리 들어설 근대음악전시관이 홍난파 기념관으로 둔갑?

반대파 “친일행적 드러난 홍난파를 화성에 들이는 건 절대 불가”
찬성파 “근대음악 전시관을 왜 홍난파 기념관으로 몰아가느냐”

 

 

이런뉴스(e-runnews) 김삼성 기자 | 근대음악전시관 반대 시민모임이 지난 6일 오후 화성시청 로비 앞에서 발족식과 함께 홍난파기념관 반대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번 반대 시민 집회는 광복회 화성시지회, 민족문제연구소, 기억과연대, 화성민예총, 그물코연구소, 화성노동인권센터, 화성여성회, 화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화성희만연대, 화성환경운동연합이 참석했다.

 

이어 이호헌(화성시 광복회 실장)과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그리고 홍성규(화성희망연대 대표)는 홍난파 친일 행적과 함께 출생지도 아닌 활초리에 근대음악전시관(홍난파 기념관)이 들어올 이유가 없음을 장엄한 연설과 외침으로 장내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중간중간 찬성파와의 마찰도 적지 않은 가운데 고성도 오갔으며,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들도 나타났지만 어쨌든 기자회견은 무사히 끝을 맺었다.

 

 

화성시 서부에는 문화 향유 시설이 많지 않은 게 현실로 이번 근대음악 전시관은 지난 2,000년 우호태 화성군수 시절부터 불거져 왔던 것으로 23년간 지지부진 이어져 온 것이 최근 정명근 화성시장이 부임하며,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의 말에 따르면, 홍난파(본명 홍영후1893~1941)가 음악적으로 인정을 받은 천재임은 분명한데 1937년 ‘동우회(同友會) 사건’을 전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가요를 작곡하고 친일단체에 가입, 1937년 5월 친일문예단체인 조선문예회에 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일제의 신민으로 살아 온 친일 행적이 드러났고 현제명과 더불어 국가가 공인한 친일파라는 주장이다.

 

반대시민모임은 “이런 친일 행적이 분명한 홍난파를 출생지도 불분명한 가운데 단지 ‘활초리’에서 태어났으니 ‘활초리’에 근대음악 전시관이라는 가면을 쓴 홍난파 기념관을 세우려는 불순한 의도가 분명하다”며 “화성시 독립운동의 성지이자 역사가 한순간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화성시의회 교육복지위원회 의원의 의견을 빌어 보면 타당성 용역이 끝난 후에 건립 추진이 이뤄질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으며, “서철모 시장 당시 홍난파 후손들의 공개 사과가 있으면 추진할 용의를 비췄고 그에 후손들도 응했지만, 결국 사과는 없었다. 그래서 근현대 음악관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한다는데 왜 홍난파를 거론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서울에서는 돌아가신 분으로 기리고 있고 음악회도 여는 등 특히 문제인 전 대통령도 ‘고향의 봄’ 노래를 부르고 공식 석상에서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노래가 ‘고향의 봄’인데 왜 그런 건 따지지도 못하면서 자그마한 동네에서 특히 홍난파 관련해서 한다는 것도 아닌데 무조건적 반대를 하는 건 공과 사를 가려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지적을 했다.

 

이어 “화성시는 현재 홍난파의 홍 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의회에서 용역 예산이 통과했을 때는 아무 말 없다가 굳이 지금 이런 걸 따지는 건 제 생각에는 윤석렬 정부에 대한 비난으로 반일 감정을 고취하고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의한 연장선상 안에서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로 보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홍난파의 친일에 대한 의견은 분분한 가운데 단지 음악적 재능과 열정을 일제 치하에서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강압과 탄압에 굴복해야만 했던 한 인간이 군상이 표적이 되어 정치 수단으로 이용당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안익태의 애국가나 홍난파의 고향의 봄은 대한민국 국민이 지금도 부르고 사랑하는 노래임이 분명하다.

 

한편, 일각에선 찬성과 반대가 대치하고 있는 지금 화성시는 현명한 방법을 동원해 전시관 건립 찬, 반대 토론을 통한 다수의 의견을 받아들여 화성 서부에 부족한 시민을 위한 문화 향유 시설의 건립을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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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성 대표기자

진실에 접근시 용맹하게 전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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